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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사비, 의무인가요! 마음인가요?

어느 날 낯선 번호로 도착한 메시지, 조심스레 열어보면 몇 년 전 잠시 함께 일했던 직장 동료의 모바일 청첩장입니다.

축하하는 마음보다 통장 잔고와 인연의 깊이를 저울질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한숨을 내쉰 경험,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이었던 상부상조(相扶相助) 문화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사회적 세금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사회생활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경조사비를 지출합니다.

특히 직장에서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관계의 원만함을 위해 기꺼이 봉투를 내밉니다. 하지만 한 해에만 직장 상사 한 명에게 그의 자녀 결혼과 빙모상 등으로 수십만 원을 지출했지만, 그가 퇴사한 뒤로는 안부 연락 한번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경험담은 씁쓸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언젠가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지출을 이어가지만 이직이 잦고 인간관계가 유동적인 현대 사회에서 그 기대는 종종 배신감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지출한 돈과 시간이 미래의 나에게 아무런 위로와 축하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경조사비는 마음의 선물이 아닌 감정적 손실로 다가옵니다.

어려운 관계의 역설

이러한 피로감 속에서 많은 이들이 대안을 찾기 시작합니다. 내 경사는 가족과 정말 가까운 몇몇 지인만 초대해 조촐하게 치르며 받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실천하기 쉬운 결심입니다. 하지만 진짜 어려운 문제는 내가 주지 않는 것의 어려움에서 발생합니다.

이미 청첩장이나 부고를 받은 상황에서 모른 척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특히 매일 얼굴을 봐야 하는 직장 동료이거나 나의 평판이 오르내리는 사회적 관계망 안에 속해 있다면 그 압박감은 더욱 커집니다.

이러한 관계의 역설 속에서 우리는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삶과 타인의 시선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게 됩니다.

시대의 변화

다행스러운 점은 이러한 고민이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개인의 삶과 가치관을 존중하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경조사에 대한 인식도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성대하게 치르는 것이 미덕이었던 돌잔치가 이제는 대부분 가족 단위의 소규모 행사로 자리 잡은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러한 변화의 기폭제가 되어 불필요하게 많은 사람을 초대하는 행사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는 얼마나 많은 하객이 왔는지가 그 사람의 사회적 능력을 증명하는 시대가 아니라 진정으로 축하하고 위로해 줄 소수의 사람들과 깊은 교감을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원칙 만들기

결국 해답은 나만의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욕심을 버리고, 나의 시간과 돈, 그리고 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관계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퇴사나 이직 후에도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사람, 형식적인 인사를 넘어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고 싶은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거절의 불편함과 관계가 소원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마주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두 번의 용기 있는 실천이 쌓이면, 불필요한 감정 소모에서 벗어나 더욱 건강하고 의미 있는 인간관계를 맺는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경조사비는 더 이상 돌려받아야 할 빚이나 의무가 아닌 나의 진심을 전하고 싶은 소중한 이에게 건네는 순수한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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